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핀란드 내전 (문단 편집) === 스웨덴의 개입과 탐페레 전투 === 1918년 백군 사령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만네르헤임]]은 핀란드의 [[카렐리아]] 지역의 주요 도시인 [[비보르크|비푸리]]와 내륙 [[피르칸마]] 지역의 핵심 공업지대인 [[탐페레]]에 대한 공세를 검토했다. 비푸리 공격의 경우 점령 시 가질 수 있는 전략점 이점은 매우 컸지만 백군의 전술적 열세와 적군의 방어-반격을 생각할 때 너무 위험했다. 결국 만네르헤임은 탐페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고 3월 16일 탐페레에서 북서쪽으로 65km 떨어진 지역에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백군 전체가 모든 전선에서 전진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공세에 적군은 당황하여 패닉에 빠졌다. 오직 몇 개 부대만 방어에 총력을 다해서 백군의 진격을 조금 늦출 뿐이었다. 백군은 3월 24일 적군의 연결을 탐페레 남쪽에서 차단하고 25일 탐페레를 포위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가전을 통해서 도시를 점령하는 것뿐이었다. 탐페레에서 16000명의 백군과 14000명의 적군이 전투에 참가했다. 핀란드에서 벌어진 첫번째 시가전이었고 이후 헬싱키와 비푸리에서도 시가전이 벌어쟜다. 본격적인 전투는 3월 28일부터 벌어졌다. 시가전이다보니 전투는 길어졌고 백군의 일부는 50%가 넘는 손실을 보기도 했다. 이에 백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4월 3일부터 총력 공세를 펼쳤다. 백군은 집 하나하나, 도로 하나 하나를 점거해 가면서 전투를 치렀다. 적군은 마을의 서쪽 절반을 4월 5일까지 잃었다. 마지막으로 적군이 점거하던 거점은 탐페레 시청이었고 이것이 함락되자 4월 6일 퓌니키(Pyynikki)와 피스팔라(Pispala)지역의 적군이 모두 항복했다. 남아 있던 적군은 수세에 몰렸지만 상당히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만네르헤임은 [[비보르크|비푸리]] 공략에 쓰려고 남겨 두었던 사냥꾼 연대를 전투에 투입했다. 3월엔 러시아군도 이곳에 투입되었고 독일군 본대도 여기에서 전투를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탐페레 전투는 핀란드 내전의 가장 격렬한 전투가 됐다. 백군은 엽병 50명을 비롯해 7~900명의 사망자를 냈고 이는 핀란드 내전 동안 가장 많은 엽병이 죽은 전투였다. 적군은 1000~1500명의 군사를 잃었고 포로로 11000~12000명이 잡혔다. 71명의 민간인들이 오폭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도시의 동쪽에 위치한 건물은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탐페레 전투 이후 백군은 비푸리로 진격했다. 비푸리 전투에 백군은 15000명의 적군을 상대로 185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전투결과 5~800명의 적군이 사망했고 12000~1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